(20,000자 제한으로 인해 1부에서 이어지는 사용기입니다.)
3D & VR
- 다른 애플 기기와 차별화되는 애플 비전만의 특징 중 하나는 콘텐츠를 3D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우선 애플에서 기본 제공하는 앱으로 Encounter Dinosaurs 라는 앱이 있습니다. 나비가 날아다니고 공룡이 튀어나오는 비주얼이나 화질이 인상적이긴 하나, 사실상 기술 데모에 가까운 간단한 앱 - 친구에게 자랑할 목적을 제외하면 구입 후 딱 한번만 실행하게 되는 - 이어서 기존의 애플 제품들과는 조금 이질적인 기본 앱입니다. 예를 들어서 Face ID를 탑재한 아이폰을 애플 스토어에 가서 보면 Face ID를 테스트할 수 있는 앱이 설치되어 있어서, 이것을 통해 Face ID의 작동 방식을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Encounter Dinosaurs 앱은 마치 이런 데모 앱이 실제 판매용 기기에 설치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입니다.
- 그 밖에 애플 TV에서 몇몇 몰입형 3D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수 Alicia Keys가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나, 코뿔소를 기르는 모습을 담은 영상 같은 것들을 무료로 볼 수 있는데, 이 영상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되는 것은 입체감 자체는 괜찮은 편이나 촬영 기술의 한계로 영상의 해상도가 다소 떨어져서 오히려 아쉬움이 크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애플 비전 프로는 기본적으로 화면에 보이는 모든 것이 고해상도로 매끄럽게 디자인되어 있는데, 정작 제공하는 3D 영상은 화질이 만족스럽지 못하니 시청시 재미가 반감됩니다. 또한 인물의 클로즈업 장면이 나올 때면 굉장히 위화감이 느껴지는 등 기존 영상 콘텐츠의 문법과 달라 발생하는 문제도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에 있어서는 기존 4k~8k 영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뛰어나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충분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 디즈니+ 에서도 몇몇 유명 작품들을 3D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영화에서의 3D는 몰입형 비디오처럼 사실감이 뛰어나지 않고, 약간의 시각적 재미를 주는 정도에 그칩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서의 3D가 일반적인 영화 감상에 더해주는 가치가 거의 없다고 생각해,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3D로 영화를 시청하면 CG의 어색함이 기존보다 훨씬 많이 눈에 띕니다. 저는 '더 마블스'를 3D로 시청했는데, 대부분의 장면에서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싶을 정도로 CG의 어색함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작품마다의 편차를 감안해야겠으나, 결국은 2D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콘텐츠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하지만 디즈니+ 앱 내에, 디즈니와 관련된 배경으로 몰입형 환경을 만들어주는 기능이 있는데... 이 기능은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어벤져스 타워 위에서 영화를 시청하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 주는데, 기본적으로 배경이 고화질로 되어 있다보니 만족감이 상당합니다. 직접 일어나서 이 공간을 구경할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안전 문제로 인해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배경이 사라져 버립니다) 더군다나 애플에서 기본 제공하는 몰입형 환경에서는 내 손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내가 공중부양을 하고 있나?'라는 느낌이 드는데 디즈니+의 가상 배경은 내가 앉아있는 의자까지도 표현이 되어 있어 더욱 재미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영화를 시청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 그 외에 기존의 3D 콘텐츠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는 3D 비디오 플레이어 앱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Moon Player' 라는 앱은 좌우 분리 형식의 3D나 VR 영상을 재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아직 앱은 부족한 점이 많으나 빠르게 업데이트를 하고 있어 애플 비전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기능들을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습니다.
- 기기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점은, 애플 비전은 애플 기기 중 유일하게 3D 시청이 가능하다는 매력이 있기는 하지만, 3D 콘텐츠 소비가 이 기기의 핵심 요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보급률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콘텐츠 제작사들이 이러한 기기를 위한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제작할만한 요인은 아직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기기의 비싼 가격은 소비자에게도 장벽이지만, 콘텐츠 생산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장벽입니다.
아이패드에 M1 칩이 탑재된 지 몇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 성능을 활용하는 앱은 애플이 만든 앱이나 애플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제작된 일부 앱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수준입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 M1 아이패드의 보급률이 충분히 높아진 다음에야, 여러 개발사들이 이에 대응한 타이틀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애플 비전과 같은 기기에서 이용할 수 있는 3D 콘텐츠 역시 애플이 제작한 것, 혹은 애플과 협력을 통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면 짧은 시간 내에 그 생태계가 확장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애플 비전 자체를 3D 콘텐츠 소비용 장비로 이해하거나 그런 목적으로 구매한다면, 반드시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에스파의 VR 콘서트가 곧 공개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 사용
- 비행기에서 영화 감상에 비전 프로를 사용해 보았는데, 확실히 비행기에서 큰 화면으로 편하게 콘텐츠를 볼 수 있는 것은 특별하고 매력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애플이 왜 애플 비전의 첫 광고로 비행기를 사용했는지 알 듯합니다. 그리고 애플 비전을 착용한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지 아닌지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외로 주변의 시선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애플 비전 프로를 한 시간 정도만 착용해도 불편함을 호소하시는 경우도 보았는데, 저나 동승자의 경우 영화 한 편을 다 보아도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 실생활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게 되는 기능은 역시 맥의 디스플레이를 확장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비록 유니버설 컨트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삐걱거리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애플 비전의 활용도를 몇 배는 높여 주는 꿀 기능입니다.
특히 애플 비전 외부로는 맥의 화면이 보이지 않고 나에게만 보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메리트입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나 공공장소, 카페 같은 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보안이 중요한 자료를 다루어야 한다면, 애플 비전으로 화면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당신이 마블의 다음 영화를 준비하는 관계자이든, BTS의 컴백을 준비하는 마케터이든, 누드 사진 전시를 준비하는 포토그래퍼이든, 남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으나 밖에서 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애플 비전 혹은 그와 유사한 기기를 쓰고 작업하는 것 외에 대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질 면에서 기본적으로 맥의 디스플레이나 일반적인 모니터가 제공하는 화질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차이에 대한 이질감은 분명히 계속 의식하게 됩니다. 즉, 애플 비전에 띄워진 모니터가 아무리 좋아도 기본 디스플레이의 열화판임을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상하게 아이패드 사이드카에 비해서 랙이 자주 발생하는 등 성능이 떨어지는 느낌도 있습니다. visionOS 1.1을 통해 어느 정도 개선이 된 부분도 있어서,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도 기대됩니다.
만약 하나의 맥 화면뿐만이 아닌 확장 모니터처럼 맥 화면을 여러 개로 넓힐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맥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쓸모가 많은 기능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무선 연결 방식의 한계상 디스플레이 1개까지가 최대일 것이라는 분석도 있어서,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일부 서드파티 앱을 통해 추가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의외로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 같은 게임을 미러링해서 플레이하는 것도 충분히 즐길만 했습니다.
짜증나는 강화 요정들을 깨워내는 방법을 화면에 띄워 놓고 참고하면서 플레이할 수도 있죠
- 개인적으로 애플 비전 프로를 구매한 큰 목적 중 하나는 집안일을 하면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빨래를 개거나 청소기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유튜브를 볼 수 있다면 멋진 일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결과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선 실내 환경에서의 노이즈가 너무 심하고, 움직일 때마다 모션 블러가 생기기 때문에 몹시 불쾌하며 시각적으로 피곤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애플 비전을 사용할 때와는 다르게, 이동하면서 사용시 어지러움이 약간 느껴집니다. 또한 두 손가락을 집는 행동이 클릭에 할당되어 있다 보니,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두 손가락이 닿기만 하면 visionOS가 클릭으로 인식해 원하지 않는 반응을 할 때가 잦습니다. 보고 있던 유튜브 영상이 멈추거나 꺼지는 것이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Guided Access를 통해 일시적으로 시스템의 상호 작용 자체를 막아버리는 방법이 있는데, 다소 번거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visionOS의 창들은 나를 따라다니지 않고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보니, 청소처럼 움직임이 많은 작업을 할 때는 사실상 아이패드나 TV를 틀어놓고 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컴퓨터로서 애플 비전의 가장 좋은 점은 자세와 위치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데스크톱 PC를 서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높이가 높은 책상, 혹은 높이 조절이 가능한 책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애플 비전을 이용할 때는? 그냥 일어서면 됩니다.
아이폰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기기를 들기 위해 한 손이 반드시 고정되거나 혹은 스탠드를 활용해 기기를 세워둘 수 있는 물리적인 자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애플 비전을 사용할 때는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스크린을 고정하기 위한 물리적인 제약이 없습니다. 게다가 기기에 기본으로 훌륭한 스피커를 탑재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스피커나 이어폰을 챙길 필요가 거의 없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컴퓨터를 이용하기 위한 물리적인 제약에 익숙하며, 평소에는 이런 개념을 거의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와 비슷한 머리에 고정하는 컴퓨터가 보편화된다면, 오히려 컴퓨터를 이용하기 위한 물리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 위의 장점과 맞물려, 의외로 애플 비전을 이용할 때 가장 기분 좋은 장소는 소파보다는 침대였습니다. 대충 편한 대로 몸을 눕히고 스크린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기분이 꽤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많은 의사분들은 침대를 잠자는 목적 이외의 용도로 이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시니 참고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총평
- 애플은 아이패드 프로를 출시한 이후, '컴퓨터란 무엇인가(What's a computer)'라는 과감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패드 프로 탄생 후 9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얼마나 달라졌나요? 물론 기술적인 의미에서 아이패드는 충분히 컴퓨터가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컴퓨터란 무엇인가요? 아이패드는 당신에게 컴퓨터인가요? 그럼 아이폰은요? 혹은, 애플워치는 어떨까요. 당신에게 애플워치 울트라 2는 컴퓨터인가요?
- 여기에 대해서는 각자 저마다의 대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Xcode를 구동할 수 없는 아이패드 프로는 여전히 컴퓨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이폰 하나면 생활에 충분한, 다른 컴퓨터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이제는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저는 그 누구에게라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전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컴퓨터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 제 생각엔 이것이 바로 애플 비전이 컴퓨터라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저에게 지금의 애플 비전 프로는, 어쩐지 도구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애플 비전 프로를 사용하고 있는 동안 그 속에서는 정말 즐겁고, 신기하며, 마법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즐거운 도구'가 아닌, '즐거운 체험'으로서 인식됩니다. 간단히 말해, 지금의 애플 비전은 도구라기보다 체험에 가깝습니다.
- 극단적인 비유를 해 보자면, 자전거는 이동을 하는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후룸라이드는 도구인가요? 아무리 자전거보다 비싸고, 빠르고, 재미있지만, 우리의 일상이라는 프레임에서 후룸라이드는 도구라기보다는 체험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 물론 애플 비전은 도구가 될 수 있는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애플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많은 사랑을 받는 도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의 애플 비전 프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제품을 이해하고, 다루고, 적응하고, 사용하는 과정에는 너무나 많은 허들이 있습니다.
한 도구의 목적을 '어떤 결과의 달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애플 비전은 많은 경우 그것을 아주 번거롭고 불편한 방식으로 접근하게 만듭니다. 목표 달성에 집중하기 이전에, 이 물건을 다루는 것부터가 이미 하나의 과업이 되는 기분입니다.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유명한 책 제목이 있습니다. 사람의 뇌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계속해서 코끼리라는 프레임을 생각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애플은 애플 비전 프로에 대해, 'seamless'하고, 'immersive' 한 컴퓨터라고 이 제품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다른 컴퓨터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몰입감이 느껴지는 순간들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패스 스루 화면의 왜곡과 모션 블러, 내 뜻대로 작동하지 않는 조작, 얼굴을 짓누르는 무게감, 수시로 뜨는 배터리 알림은,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 진정한 몰입을 계속해서 방해합니다. 애플 비전 프로를 사용하는 동안 애플의 의도처럼 이 기기에 대해 잊는 것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 몰입감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비전 프로는 그 어떤 애플 기기보다 큰 화면을 제공하지만, 큰 화면은 과연 더 높은 몰입감을 제공할까요? 혹은 그 몰입감은 콘텐츠를 보는 즐거움을 더해줄까요? 화면의 배경이 아이폰의 베젤 대신 극장 모양의 3D 그래픽으로 바뀐다고 해서 그 콘텐츠가 나에게 갖는 의미가 달라질까요?
마치 음악을 감상할 때 더 큰 볼륨으로 음악을 들으면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가의 문제와 비슷하게, 어떤 사람들은 동의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애플 비전을 사용하면서, 화면을 크게 본다고 해서 콘텐츠가 더 즐겁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ADHD로 인한 어려움이 있는 분들처럼 어떤 분들에게는 이 작은 차이가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강조하는 '몰입감'이라는 개념이, 마치 모바일 시대의 '혁신성', '직관성'이라는 수식어를 대신하기 위해 내세우는 공허한 마케팅 용어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 애플의 여러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생각하는 애플이라는 브랜드의 장점 중 하나는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애플 워치를 성공시킬 때도, 에어팟을 성공시킬 때도 애플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여전히 스마트폰에서 헤드폰 잭을 없앤 결정을 성급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런 애플의 과감함에는 조급함이 아닌 여유가 뒷받침되어 있었습니다. '이걸로 충분하다'는 여유 말이죠. '이걸로 충분하다'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애플 제품의 외관을 포함한 디자인, 혹은 사용자 경험에 그대로 맞닿아 있는 중요한 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애플 비전 프로는 거의 모든 면에서 너무나 조급하다는 인상을 주고, 단순한 경험, 정돈된 경험이라는 애플 제품의 매력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아, 어떤 애플 제품 사용 경험과 비교해도 이질적입니다. 2024년에 이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즐거운 부분이 있고, 남들보다 더 미래를 빨리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제품이 주지 못하는 고유한 장점을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약 이 제품을 애플이 만들지 않았더라면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이 기기에 대한 아쉬움에는 하드웨어적인 부분과 함께 소프트웨어적인 부분도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 뜻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으로도 이 기기의 사용 경험 중 많은 것들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1세대 구매자로서는 아쉽긴 하지만 애플은 미완성의 OS와 함께 이 기기를 출시했고, 좀 더 보급형에 가까운 제품이 나오기까지 애플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차기 제품에 대한 루머로는 2025년 말에 후속 모델이 나온다는 설(블룸버그)이나, 2027년 말에 차기 제품이 나온다는 설(Kuo) 등이 있습니다. 이 출시 계획대로라면 애플은 visionOS 3 또는 visionOS 5 에서 더 야심 찬 업데이트를 선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애플 비전이라는 생태계가 지금보다 더 보급되기 위해서는 최소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기쁘지만은 않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많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환불할 수도 없지만) 이 제품을 환불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제품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저 역시 적응하고 있고 더 자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며, 다른 기기가 아닌 이 제품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슷한 종류의 다른 제품들은 애플 비전 프로보다 화질이 더 떨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아직은 다른 제품을 시도해 볼 생각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제품의 화질은 이런 경험이 만족스럽기 위한 마지노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 또한 이러한 제품은 (그러니까 그 '공간 컴퓨터'라는 것은) 언젠가는 우리 삶에 꽤 큰 부분, 쉬운 말로 '대세'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여전히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연성에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흔히 '스마트 기기'로 부르는 여러 기기나 그 경험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유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이 책은 여전히 읽기 편리하지만, E-북 앱으로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글씨 크기를 변경할 수 있고, 종이 색을 변경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필기와 수정이 가능한 유연성을 경험합니다. 굿노트가 사랑받는 이유 역시 공책만큼 직관적이지는 않더라도, 수정과 편집에 무한한 유연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을 편집할 때 테이프를 잘라서 편집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현재의 편집 툴이 제공하는 유연성은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이렇듯 단순히 편리함, 직관성이 최우선의 가치가 아닐 수 있는 이유는, 유연성이 제공하는 바꿀 수 없는 가치 역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유연성의 측면에서, 이 공간 컴퓨터는 기존의 스마트 기기에 더 높은 수준의 유연성을 추가하는 수단입니다. 내 신체, 내 위치, 내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은 이런 형태의 기기가 아니라면 쉽게 누리기 어렵습니다. 이 기기가 사랑받기 위해서 반드시 그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고유한 콘텐츠와 기능으로 무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지금까지처럼 카카오톡을 하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유튜브를 시청하더라도, 그것을 더 유연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결합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익숙하지만 구식인 지금까지의 방식에서 생각보다 빠르게 벗어날 지도 모릅니다.
Pros
- 이 기기를 사용할 때면 정말로 미래를 만나는 기분이 듭니다. 비아냥이 아니라 정말로 그 자체가 이 기기의 큰 매력이자 장점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나 장치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애플 생태계의 일부라는 점은 확실한 강점입니다. 기존에 구매했던 앱과 콘텐츠들을 그대로 이용 가능하며, 아이클라우드나 에어드랍 등 애플 시스템의 좋은 기반들이 시스템 곳곳에 유연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맥과의 조작이 자연스럽게 연동되는 부분이나, iCloud를 통해 폰에서 찍은 파노라마 사진이나 3D 영상을 별도의 과정 없이 바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 기기의 활용 가치를 몇 배 더해줍니다.
- 맥이나 아이폰은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요소가 많이 있지만, 적어도 아이패드는 펜슬 기능을 제외하면 애플 비전으로 상당 부분 대체가 가능합니다. 멀티 태스킹이 한 차원 강화된 아이패드를 다루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Cons
- 콘텐츠 시청과 스피커를 제외한 이 제품의 모든 것은 미완성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 조작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순간은 큰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 이 기기의 무게가 그리 불편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내가 뭔가 굉장히 거슬리는 것을 얼굴에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플러스 사이즈의 아이폰을 사용했던 경험과 비교하고 싶습니다.
- 너무나 복잡하고 섬세한 기기이며, 직관적인 이해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또한 애플의 다른 고가형 제품에 비해 기기가 너무 연약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 세상 어딘가에 이 기기와 거의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400만 원 이상 저렴한 기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기가 힘듭니다.
막상 이렇게 몇 달 지나니 사용기에 정말 오랜만에 리뷰가 올라오는 걸 보고,
아, 올 해 이런 제품도 있었지...라고 벌써 잊혀졌다는 느낌이ㅜㅠ
앞으로 몇 세대는 더 지켜봐야 할 시장 같습니다.
몇주 후에 출시 국가가 좀 더 확대된다는 루머가 있어서, 그 이후에 또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고 있습니다.
본문에 이것보다 낮은 화질의 기기를 쓸 생각은 없다고 적긴 했지만 실제로 써 보면 애플 비전 프로 구매를 크게 후회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다른거는 그냥 없다치고 영화만 보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아요. 개인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착용감인데 좀 과장해서 얘기하면 퀘2보다도 안좋아요
개인적으로 3D 영화에 대한 애정이 적어서 단점 위주로 느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몰입형 콘텐츠는 흥미롭긴 하지만 기술적인 제약 극복과, 이 포맷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여러 시도들이 앞으로 필요해 보이고요. 다만 2D 콘텐츠 기준으로는 확실히 폰이나 패드에 비해 보는 맛이 좋긴 합니다.
애플 스토어의 수많은 기기 중 유일하게 직원의 도움 하에만 테스트해볼 수 있는 기기라는 점이 이 기기의 현재를 정확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더 쉬운 UX에 대한 고민이 앞으로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른 리뷰어 영상에서 실감난다고 하기에 해상도도 당연히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화질(25PPD이상) 180 VR 3D 콘서트 영상이 늘어났으면 좋겠는데... 특히 비주얼 강조하는 KPOP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메타가 블랙핑크 콘서트를 하긴 했는데 2D에다가 전용 촬용도 아니라서 많이 아쉽더군요.
애플 메타 둘다 성공해서 컨텐츠가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한 자세한 사용기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제가 다른 VR 기기를 사용해보지 않아서 너무 기준을 높게 잡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3D로 화면을 가득 채워서 실감이 나긴 하지만,
몰입형 비디오의 한계상 우리가 흔히 보는 1080p 비디오에 비해서도 해상도의 한계가 더 눈에 띄다 보니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본문에도 적었지만 에스파와 EXO 카이의 VR 콘서트가 곧 공개될 예정이던데,
이 콘텐츠들이 좋은 반응을 얻는다면 긍정적인 신호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가끔 유튜브 리뷰 같은걸 보다 보면 '영화를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볼 수 없는 것'을 단점으로 꼽는 분들이 종종 계시던데,
개인적으로는 그 용도로 개발된 전자제품(티비)이 이미 있는데, 혼자만 본다는 걸 단점으로 꼽는 건 크게 공감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고가의 플래그십 헤드폰을 리뷰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음'을 단점으로 꼽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에 부가세, 애플케어플러스, 항공료까지...
중간 중간 나오는 인사이트가 공감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인사이트라고 하긴 거창하지만, 한달 내내 500만원 + 항공료의 가치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왔네요(?)
- 간단히 말해, 지금의 애플 비전은 도구라기보다 체험에 가깝습니다.
- 애플 비전 프로는 거의 모든 면에서 너무나 조급하다는 인상
- 다른 기기가 아닌 이 제품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 여기서 뽐이오네요 ㅋㅋㅋ
- 이유는, 유연성이 제공하는 바꿀 수 없는 가치 역시 존재
자세히 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은 시장이 초기 단계이지만 해외 시장으로 확대되고 visionOS 2 도 나온다면 더 다양한 사용 케이스들이 생길 것 같습니다.
/Vollago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전 프로도 나오면 뭐 다 달라질꺼처럼 해도, 막상 써보니 기존 vr 에서 큰 혁신은 없는것 같네요.. 5분 쓰고 이게 끝이야?하고 껏네요...
결국 디바이스의 무게, 여러가지 영상처리기술의 한계 등등으로 인해서 아직 상용화는 좀 더 가야할껏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예상으로는 사실 애플이 기술의 난제를 극복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이 기기의 단점에 적응하는게 더 빠르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애플 워치 처음 나올때, 배터리가 최소 일주일 정도는 가지 않으면 너무 불편한거 아니냐? 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도 애플워치 배터리는 그대로 1~2일 정도인데 그냥 유저들이 매일 시계를 충전하는 불편에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애플 비전도 어쩌면 비슷한 길을 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말씀과 소감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이패드를 2세대부터만 사용했다 보니 출시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서 완전히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이패드도 10년여에 걸쳐 멀티태스킹 도입, 애플 펜슬 지원, 트랙패드 지원 등을 거치며 오랜 시간 이 기기의 포지션과 사용성을 다듬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애플 비전 역시 벌써부터 '망한 기기' 취급하시는 반응도 가끔 있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에 저는 더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패드 출시 시절 애플이 보여준 전략과의 중요한 차이점은, 아이패드는 어쨌든 '큰 필요가 없어도 일단 하나쯤은 갖고 싶은 기기'로 포지션했던 반면, 애플 비전은 의도적으로 '프로' 모델을 먼저 출시하고 500만원대로 가격을 책정하면서, 일반 유저들과 거리감을 두는 전략을 채택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미래 시점에 2024년을 되돌아봤을때, 이 전략이 효과적이었는지 아니면 실책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글을 준비하면서 유튜브에 올라온 애플 비전 프로 리뷰들을 거의 다 살펴 보았는데, '화질은 좋지만 무겁고 비싸고 할 게 없어서 창고행임' 정도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리뷰도 많아 (물론 유튜브 리뷰는 한 2시간 분량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핵심만 간추릴 수 밖에 없죠) 그 외의 얘기들 위주로 최대한 써보고 싶었는데 그런 점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머지는 제가 머릿속으로 생각만하고 밖으로 표현을 못하는 부분들을 글로 잘 정리해서 적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싶어서 댓글 달아봅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기존에도 3D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경험이 10번도 안 되는 수준이라 상대적으로 3D에 기대치가 더 컸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극장에서 3D 영화를 자주 봤다면 더 자세한 비교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은 자이즈 렌즈를 사용하면 효과가 더 잘 체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도 애플 비전 프로가 국내 출시된다면 자이즈 렌즈도 구매해서 사용해 볼 예정입니다. 콘택트 렌즈 끼고 사용하는 게 너무 불편해요...
이제 3-4세대 정도 계속 출시를 하면서 얼마나 다듬을 수 있는지, 3-4세대 계속 개발하면서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정도 시간이 지났을때 과연 vr은 차기 인터페이스로 정착할 수 있는지 그게 문제죠... 문제가 산더미...
그러다보니 아직 완전하게 성숙되지 않은 기술로 무리수를 던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VR / AR 이런류는 아직 발전여지가 참 많아서 좀 더 공대냄새 나는 회사들이 많이들 하는 거니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