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케이블이 사운드 튜닝의 일부
"왼쪽이 커핀 클라나, 오른쪽이 커핀 델시입니다."
이어폰 쪽의 케이블 커넥터는 호환성이 높은 2핀 규격입니다. 움푹 패인 형태가 아니므로 다양한 케이블 교체를 해볼 수 있지만 저는 기본 케이블 사용을 권하겠습니다. 케이블 선재는 동선인데 이게 델시의 진동판에 쓰인 DLC (Diamond-Like Carbon)의 속성에 맞춰서 선택된 선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지요? (-_-)a 클라나와 델시를 나란히 두고 둘의 기본 케이블을 바꿔 끼우면서 비교 청취를 해봤습니다.
음색이 크게 바뀌거나 하지는 않는데 델시의 소리 성향에 어울리는 것은 역시 델시의 기본 케이블입니다. 이 케이블을 연결했을 때 델시의 저음 펀치가 조금 더 단단해지며 고음의 청량감이 살아납니다. 클라나의 기본 케이블은 평판형 자석 드라이버 소리의 질감을 곱게 다듬어주는 듯합니다. 그래서 델시에 연결하면 소리가 살짝 풀어지면서 심심한 느낌이 듭니다. 즉, 두 이어폰을 만든 사람이 기본 케이블을 사운드 튜닝의 일부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델시의 10mm 다이내믹 드라이버는 진동판 소재로 DLC와 PU를 혼용합니다. 다이내믹 드라이버의 진동판 영역은 대체로 중앙의 돔과 테두리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돔에서 주로 고.중음이 재생되며 테두리에서 저음이 나옵니다. 짐작하건대 델시의 진동판은 다이아몬드 같은 카본 (DLC) 소재로 돔을 만들어서 고음을 보강하고 PU 소재 테두리로 저음을 빵빵하게 키운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어폰의 하드웨어 완성도 만큼 사운드도 평범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SOUND
커핀 델시의 주파수 응답 범위는 20 ~ 20,000Hz이며 드라이버 임피던스는 28옴, 드라이버 감도는 약 108dB라고 합니다. 저에게는 실제 체감되는 드라이버 감도가 상당히 높아서 기기 볼륨을 조금 낮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이내믹 드라이버는 소리 크기보다도 소리의 '굵기'와 '질감'에서 헤드폰 앰프의 긍정적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쉽게 말해서 더 강하고 두툼하며 매끄럽게 들림.) 델시를 스마트폰으로 듣는다면 USB 동글 앰프 연결을 권장하며, DAP 헤드폰잭으로 듣는다면 게인(Gain) 옵션을 High로 맞춰두시기 바랍니다.
저의 경우는 그레이스 디자인 M900 + 바쿤 CAP-1003 세트 뿐만 아니라 Fiio K3와 코드 모조 2에서도 델시의 진동판 감촉(?)이 더욱 매끈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시 언급하건대, 이 이어폰은 소리의 모든 부분이 제법 의도적으로 설계되어 있으므로 되도록 기본 이어팁과 기본 케이블의 사용을 권하고 싶습니다.
*'클라나의 DD 버전'이라고 해도 될 듯! 그런데 다르긴 다르다!
이어폰의 외형도 그렇지만 소리를 듣노라면 동일 인물이 만든 제품이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드라이버의 종류가 완전히 달라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델시는 사운드 시그니처의 근본이 클라나와 많이 닮았습니다. 높은 저음과 초저음을 골고루 풍부하게 강조하며, 중음의 선이 굵고, 낮은 고음을 약간 낮추면서 고음의 일부분을 조금씩 강조한 모양새입니다. 즉, 기본은 중.저음이 포근한 느낌을 주면서 소리의 높은 해상도를 골고루 챙긴 사운드 튜닝입니다. 이 정도라면 델시를 '클라나의 DD 버전'으로 생각하고 그냥 구입해도 될 듯합니다. 그런데! 델시가 클라나와 아주 크게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1) 음색이 뚜렷하게 밝습니다. 고음이 샤프하고 시원합니다. 저음이 든든하게 강조되어 있지만 언제나 고음이 사이다처럼 청량한 느낌을 줍니다.
2) 중.저음의 응답이 매우 빠르며 단단하게 끊어서 치는 펀치를 만듭니다. 저음의 덩어리가 크고 울림이 묵직하지만 진동의 흐름이 늘어지지 않으며 아주 강한 탄력을 지닙니다. 커다랗고 탱탱한 고무공이 빠르게 튄다고 상상하면 되겠습니다.
커핀 클라나는 평판형 자석 드라이버 이어폰들 중에서도 중.저음형에 속하며 듣기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있습니다. 예전에 올린 리뷰에서도 클라나의 소리 해상도가 소름 돋을 정도로 높지는 않으며 토탈 하모닉 디스토션(THD) 수치가 조금 높게 나올 듯한 '잔향감 있는 소리'에 가깝다고 언급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커핀 델시는 다이내믹 드라이버의 진동판에 '고음이 잘 나오는 소재'와 '중.저음이 빵빵하게 나오는 소재'를 혼용해서 샤프한 고음과 단단한 저음을 모두 확보합니다. THD 수치만 짐작한다면 클라나보다 더 정밀하고 명확한 소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청음 매장에서 두 제품을 비교 청취할 수 있다면 꼭 해보시기 바랍니다. 상당히 재미있을 겁니다. (-_-)b
*높은 해상도, 음 분리 능력, 음악 듣는 즐거움
그래서~ 적어도 제가 듣기에는, 평판형 자석 드라이버의 클라나는 자연 악기와 클래식, 재즈에 잘 어울리고, 다이내믹 드라이버의 델시는 파워풀한 댄스 뮤직과 락, 메탈에 잘 어울리는 듯한 소리가 됐습니다. (물론, 유저의 입맛에 따라서는 둘 다 올라운더 타입일 수도 있음!) 그리고 미리 확정해두건대, 델시의 소리 품질은 10만원 근처의 가격을 크게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청취부터 높은 해상도와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저음이 강조됐는데 고.중음 요소가 깨끗하게 나오는 음 분리 능력이 좋습니다.
제가 커핀 클라나를 구입한 이유는 소음 차단이 잘 되고 착용이 편하며 소리가 음악과 영화에 모두 잘 어울려서이지만, 그 바탕에는 커핀이라는 브랜드 뒤편에 있는 이어폰 제작자의 실력이 있습니다. 클라나를 리뷰할 때 '이 양반이 가성비 이어폰을 만들면서 소리의 해상도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음악적 재미를 모두 고려했구나...'라며 감탄해서 리뷰 원고를 다 쓰기도 전에 구매 버튼을 클릭한 겁니다. 즉, 클라나와 델시는 모두 음악 듣기에 즐거운 이어폰이라서 더 높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밀한 사운드 튜닝, 일렉트로닉 뮤직의 최적화
보급형 다이내믹 드라이버 이어폰의 가장 큰 단점은 저음이 너무 강하며 고.중음의 음색이 인공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가 영화, 게임 사운드에서는 훨씬 재미있으므로 저도 그런 소리 성향의 다이내믹 드라이버 이어폰을 플레이스테이션 4 게이밍과 넷플릭스 시청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델시의 사운드 튜닝은 뭔가 다릅니다.
높은 저음이 더 강조되어 있지만 너무 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음반에서 저음 악기들이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드러낼 정도까지만 확실하게 강조됩니다. 중음 영역은 낮은 부분까지 포함해서 선이 두텁게 보강되며 밀도가 높아서 질감이 매끄러우니 사람 목소리와 현악기 소리가 더욱 듣기 좋아집니다. 고음은 청각 자극이 될 만한 부분을 줄이고 7~10kHz 영역에는 제대로 피크(Peak, 뾰족)를 넣어서 밝고 예쁜 느낌이 들도록 했습니다. 음악 속 드럼의 하이햇과 심벌즈 소리가 훨씬 명료해지며, 일렉트로닉 뮤직의 전자음이 리얼한 '디지털의 결'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혹시... 클라나와 델시 중에서 하나를 사려고 고민 중인데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을 즐겨 듣거나 일렉트로닉 뽕(-_-)이 첨가된 곡만 듣고 있다면, 저는 무조건 델시를 추천하겠습니다.
*이거 혹시 BA + DD 하이브리드인가요
잠시 키보드 타이핑을 멈추고 생각해봅니다. 만약 여러분이 델시의 제품 사양을 모르는 상태로 첫 청취를 한다면 DD 이어폰이 아니라 BA + DD 하이브리드 이어폰이라고 짐작하실 것 같습니다. (*퓨전 재즈나 빅 밴드 재즈를 들으면 이 생각이 더욱 확고해짐.) 밸런스드 아머처 드라이버의 정밀하고 밝은 고음과 다이내믹 드라이버의 밀도 높고 든든한 중.저음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기본 실리콘 이어팁과 기본 케이블로 듣는다면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이 물건의 소리는 잔향이 적고 맑은 울림이 나오도록 조정되어 있으며, 어떤 종류의 음악이든 현대적이고 디지털 성향에 어울리는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감탄하게 되는 점은, 분명히 밝고 샤프한 고음인데 귀를 피곤하게 만들지 않으며 음악에 인공적 색채를 더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딱 듣기 재미있을 만큼만 선명하게 만드는 밝은 고음입니다. 그래서 델시는 여성 보컬과 바이올린 소리를 화사하게 만들며 남성 보컬과 첼로 소리에서도 높은 음을 시원하고 달콤하게 양념하는 특기가 있습니다.
*유선 이어폰의 시작점을 위한 고품질
음, 델시도 한 개 사야겠네요. (쿨럭) 자연스럽고 포근한 음색으로 자연 악기 소리를 듣고 싶다면 클라나를, 샤프한 고음과 단단한 중.저음으로 재미를 보고 싶다면 델시를 쓰면 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뜬금없는 지름 예고와는 별개로, 유선 이어폰 세계에 입문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조언하고 싶습니다. 입문 초기에 색다른 소리로 즐거운 경험을 한 후 점점 자연스럽고 심심한 하이엔드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고, 초기부터 편안한 소리로 시작해서 점점 아찔한 소리 경험을 향하여 탐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중에서 델시는 처음부터 귀에 꽂히는 선명도와 타격감으로 재미를 주는 쪽이고, 클라나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늑함과 잔향으로 차분하게 휴대 음향 세계를 안내합니다.
두 제품 모두 평탄한 소리와는 거리가 멀고(굳이 비유한다면 하만 타겟 곡선과 유사한 쪽인 듯), 어디까지나 '입문용'으로서 특기를 낸다는 점도 강조하겠습니다. 커다란 스피커들의 하이파이 오디오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어폰 헤드폰의 세계에도 폭넓은 등급과 현찰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클라나와 델시는 바로 그 시작점에서 고품질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음악 감상 뿐만 아니라 영화와 게임의 사운드를 함께 즐기고 싶다면 두 제품 모두 소음 차단 능력, 편한 착용감, 선명한 소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무선 이어폰보다 충실한 소리의 생활용 유선 이어폰으로써 이 정도 수준이라면 저는 아주 충분하다고 봅니다. ■
*이 리뷰는 셰에라자드의 고료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